박영화(1859)

박영화(朴永和, 1859~?)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친일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화숙(和叔)이다. 그는 조선의 전통적인 관료 체계에서 성장하여 대한제국기까지 고위직을 역임하였으나, 국권 침탈 이후에는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 기구에 참여하며 친일 행적을 남겼다.

그는 1891년(고종 28)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며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승정원 주서와 홍문관 수찬 등 중앙 요직을 거쳤으며, 평안도 순천군수와 경상남도 함안군수 등을 지내며 지방 행정 경험을 쌓았다. 1902년에는 비서원 승지에 올랐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정3품 이상의 당상관 직위를 유지하며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박영화는 조선총독부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되었다. 이는 대한제국의 전직 고위 관료들을 식민 통치 체제 내로 포섭하려 했던 일제의 정책에 부응한 결과였다. 그는 중추원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조선인들의 여론을 일제에 우호적으로 조성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중추원 부찬의로서 식민지 통치 초기 단계에서 일제의 시책을 홍보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이후에도 식민 통치 협력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구한말 유교적 교양을 갖춘 관료 지식인이 식민 권력에 굴복하거나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해방 이후 박영화는 친일 행적이 명백한 인물로 분류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 직속 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시켜 그의 행위를 공식적인 친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