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윤(崔道潤, 1882~1911)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전라북도 태인(현 정읍시) 출신이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 국운이 기울자 가산을 정리하고 의병을 일으켜 구국 운동에 앞장섰다.
최도윤은 1906년 면암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그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며 본격적인 의병 투쟁의 길을 걸었다. 최익현의 부대가 해산된 이후에도 투쟁 의지를 꺾지 않았으며, 1907년 정미칠조약에 따른 군대 해산 이후 전라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세력을 규합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지형지물을 활용한 유격전술에 능했으며,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임병찬 등과 협력하여 전라북도 임실, 순창, 장수 등지를 무대로 일본군 및 경찰 시설을 공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일본 세력의 거점이던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고 일제의 수탈 기지였던 농장과 통신 시설을 파괴함으로써 일제의 식민 통치 행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 최도윤의 의병 부대는 엄격한 군율을 유지하여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았기에 민중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일제의 소위 '남한 대토벌 작전'이 전개되면서 의병 활동은 점차 고립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최도윤은 험준한 산악 지대를 거점으로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1910년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격 끝에 체포되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일제의 회유를 단호히 거부하며 민족적 지조를 지켰고, 결국 1911년 전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최도윤의 투쟁은 비록 일제의 강력한 무력 앞에 좌절되었으나, 호남 지역 의병 운동의 맥을 잇고 항일 정신을 고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의 애국정신은 이후 전개된 다양한 형태의 항일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현재 그의 고향인 정읍 등지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