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

1907년은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 재편이 가속화되고, 동아시아에서는 대한제국의 국권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격동의 해였다. 유럽에서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삼국 협상(Triple Entente)을 완성함으로써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중심의 삼국 동맹에 맞서는 외교적 구도를 형성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향하는 발판이 되었으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전쟁 규범을 논의했으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국제 평화 유지라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대한제국 역사에서 1907년은 국권 상실의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해였다. 고종 황제는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서구 열강의 외면으로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순종이 황제로 즉위했으나,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행정권의 핵심인 차관 임명권을 장악했다.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은 민족적 저항을 극대화했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희가 자결로 항거했고, 해산된 군인들은 무기를 들고 의병에 합류했다. 이는 의병 투쟁의 규모와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정미의병의 시작이었으며, 이후 의병 활동은 단순한 저항을 넘어 전면적인 구국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연합 부대를 결성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는 등 조직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경제와 사회 부문에서는 민족의 자립을 위한 자강 운동이 전개되었다. 대구에서 서상돈 등의 주도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 진 빚 1,300만 원을 국민들의 성금으로 갚아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거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또한 안창호, 양기탁 등을 중심으로 비밀 결사인 신민회가 조직되어 교육과 산업 진흥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과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의 초석을 다졌다. 한편, 평양에서는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 개신교가 한국 사회 내에서 종교적,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경제권에서는 '1907년 금융 공황(Panic of 1907)'이 발생하여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뉴욕 증권 시장의 급락과 주요 은행들의 파산은 현대적 중앙은행 시스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훗날 연방준비제도(Fed)의 창설로 이어졌다. 과학 기술 분야에서는 루미에르 형제가 컬러 사진 공정인 '오토크롬'을 상업화하며 시각 매체의 혁명을 예고했고, 레오 배클랜드가 최초의 합성 플라스틱인 베이클라이트를 발명하며 소재 공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