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디보 케이타(Modibo Keïta, 1915년 6월 4일 ~ 1977년 5월 16일)는 말리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아프리카 독립 운동의 상징적인 지도자이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프랑스령 수단(현재의 말리)의 바마코-쿠라에서 태어났으며, 아프리카의 단결과 사회주의적 발전을 주창한 대표적인 범아프리카주의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가문은 말리 제국의 통치자였던 순디아타 케이타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케이타는 세네갈 다카르의 윌리엄 퐁티 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교사로 재직하며 계몽 활동과 정치 참여를 시작했다. 1946년 아프리카민주연합(RDA) 창설에 기여하고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서아프리카 지역의 반식민지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1956년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아프리카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프랑스 국회 부의장 및 내각의 국무장관직을 수행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1959년 케이타는 세네갈과 함께 말리 연방을 결성하여 초대 정부 수반에 올랐으나, 1960년 내부 갈등으로 연방이 해체되면서 말리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집권 기간 동안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하여 농업 집단화와 국영 기업 설립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또한 비동맹 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기니의 아메드 세쿠 투레와 협력하여 아프리카 단결 기구(OAU)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1963년 레닌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심각한 경제난과 화폐 개혁의 실패는 국민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당내 보수파와의 갈등 또한 심화되었다. 결국 1968년 11월 19일, 무사 트라오레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그는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키달(Kidal) 등의 감옥에 수감되어 가혹한 수형 생활을 겪었으며, 1977년 수감 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군사 정권은 사망 원인을 지병이라고 발표했으나 타살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1991년 무사 트라오레 독재 정권이 붕괴된 후, 모디보 케이타의 명예는 공식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는 오늘날 말리의 국부이자 아프리카의 완전한 독립과 통합을 위해 헌신한 영웅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1992년 바마코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말리의 수도 바마코에 위치한 국제공항의 명칭 또한 그의 이름을 따서 '모디보 케이타 국제공항'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