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7년은 서구 대항해 시대의 전환점이 된 해이자, 세계 각지에서 중대한 탐험과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유럽의 탐험가들은 새로운 해상 경로를 개척하며 미지의 대륙으로 나아갔고, 이는 향후 수세기 동안 이어질 세계 경제와 정치 지형의 변화를 예고하는 서막이 되었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는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인도 항로 개척을 위한 대장정에 올랐다. 그는 네 척의 배를 이끌고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해안을 거쳐 인도양으로 진입했다. 이 항해는 유럽인이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와 직접 교역할 수 있는 해상 경로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으며, 이듬해 그가 인도 캘리컷에 도달함으로써 성공적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7세의 후원을 받은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 조반니 카보토(존 캐벗)가 북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 그는 1497년 6월 24일 오늘날의 뉴펀들랜드 혹은 케이프 브레튼 섬으로 추정되는 북아메리카 해안에 도달했다. 카보토는 이 지역을 국왕의 영토로 선포했으며, 이는 바이킹 이후 유럽인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최초의 기록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잉글랜드의 북미 영유권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종교적 극단주의가 정점에 달했다. 도미니코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주도로 이른바 '허영의 소각' 사건이 발생했다. 사보나롤라를 따르는 무리는 사치품, 장신구, 화장품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작품과 서적 등을 죄악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광장에서 불태웠다. 이 사건은 당시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의 몰락과 함께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대한 종교적 반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반도의 조선 왕조에서는 연산군 재위 3년 차를 맞이했다. 1497년은 전대 국왕인 성종의 치세를 기록한 《성종실록》의 편찬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이다. 정치적으로는 성종 대에 성장한 사림 세력과 기존의 훈구 세력 사이의 갈등이 수면 아래에서 심화하고 있었으며, 이는 이듬해 발생하는 무오사화의 전조가 되었다. 한편, 국가 운영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법전 정비와 성리학적 질서 확립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