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0

1090년은 율리우스력의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1세기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세계사적으로 다양한 정치적, 종교적 변동이 일어난 해였다. 중동에서는 이슬람 시아파의 일파인 이스마일파가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 간의 영토 분쟁이 격화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고려와 북송이 각자의 체제를 정비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등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를 보냈다.

이 해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는 중동에서 일어났다. 하산 에 사바(Hassan-i Sabbah)가 이끄는 니자리 이스마일파가 현재의 이란 북부에 위치한 알라무트(Alamut) 요새를 점령한 것이다. 하산은 이 험준한 산악 요새를 대규모 무력 충돌 없이 치밀한 전략과 내부 포섭을 통해 장악했다. 알라무트 요새의 점령은 훗날 십자군과 이슬람 제국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이른바 '암살단(어쌔신, Hashashin)' 국가의 공식적인 출범을 의미했다. 이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약 160년 동안 셀주크 제국 등 주변의 강력한 순니파 국가들에 대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에서는 북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무라비트 왕조(Almoravids)의 공세가 두드러졌다. 무라비트 왕조의 지도자 유수프 이븐 타쉬핀은 레콩키스타(국토 회복 운동)를 추진하던 기독교 국가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알 안달루스(이슬람 치하의 이베리아반도) 지역으로 진출해 있었다. 1090년, 그는 타이파(Taifa)라 불리는 이슬람 소국들의 분열과 무능을 이유로 그라나다(Granada)를 비롯한 여러 타이파 국가들을 직접 정복하고 통치권 아래 두었다. 이는 이베리아반도 내 이슬람 세력이 강력한 단일 왕조 아래 재결집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기독교 세력과의 대립을 한층 더 격화시켰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고려와 북송이 문화적, 기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한반도의 고려는 제13대 국왕인 선종의 치세 아래 평화로운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선종은 불교를 장려하고 송나라, 요나라, 일본 등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며 국가의 내실을 다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고자 시작된 초조대장경 조판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의 북송에서는 철종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학문과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과학자 소송(蘇頌)이 수도 카이펑에 거대한 수력 천문 시계탑을 건설하는 작업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진행되는 등 송나라의 르네상스가 이어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1090년은 11세기 말의 거대한 역사적 폭풍을 예비하는 전환기적 성격을 지닌다. 알라무트 요새를 중심으로 한 니자리 이스마일파의 부상은 중동의 정치적 지형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무라비트 왕조의 이베리아반도 개입은 종교 간의 충돌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중동과 유럽의 정치·종교적 긴장감과 세력 재편은 불과 몇 년 뒤인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거쳐 1096제1차 십자군 원정이 발발하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