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마티유 필리베르 세뤼리에(Jean-Mathieu-Philibert Sérurier)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군인이자 제국 원수이다. 1742년 란(Laon)의 하급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이 군직에 투신했다.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초기 이탈리아 원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명성을 쌓았으며,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할 당시 임명된 14명의 현역 원수와 4명의 명예 원수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세뤼리에는 1755년 민병대에 입대한 후 7년 전쟁에 참전하여 하노버, 포르투갈 등지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구체제 아래에서 대위 계급까지 승진했으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그의 군 경력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많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국외로 망명하거나 숙청당하는 혼란 속에서도 그는 공화국 정부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며 군에 남았다. 1794년에는 사단장으로 승진하여 알프스 방면군에서 활동하며 군사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179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세뤼리에는 그의 휘하에서 가장 신뢰받는 노련한 장군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몬도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었으며, 만투아 포위전 등 주요 작전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는 점령지에서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고 약탈을 엄격히 금지하는 청렴한 태도를 보여 '이탈리아의 처녀(La Vierge d'Italie)'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당시 부패와 약탈이 빈번했던 군대 내부에서 그의 도덕적 위상을 상징하는 칭호였다.
나폴레옹 제정이 수립된 이후, 세뤼리에는 고령을 고려하여 일선 지휘보다는 주로 행정 및 명예직을 맡았다. 그는 원로원 의원을 지냈으며 1804년부터 앵발리드(Les Invalides) 주지사로 재직했다. 1814년 반프랑스 동맹군이 파리로 진격해 들어오자, 그는 적군에게 전리품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앵발리드에 보관되어 있던 1,417개의 적군 군기(軍旗)를 마당에서 모두 소각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프랑스 군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당시에도 황제를 지지했으나, 나폴레옹의 최종 몰락 이후에는 루이 18세에 의해 직위를 유지하며 평온한 말년을 보냈다. 1819년 12월 21일 파리에서 77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1847년 앵발리드로 이장되어 안치되었다. 세뤼리에는 화려한 전술가는 아니었으나, 정직함과 엄격한 군기 유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가진 군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