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1849-1940)는 일본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를 거치며 활동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명문 공가(公家)인 도쿠다이지 가문에서 태어나 사이온지 가문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당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신 세력에 가담하여 관군을 이끌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10년 동안 유학하며 서구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깊이 있게 수용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훗날 일본 정계 내에서 온건하고 국제 협력적인 성향을 견지하는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귀국 후 정계에 투신한 사이온지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으며 입헌정우회의 총재를 맡는 등 정당 정치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1906년과 1911년 두 차례에 걸쳐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이 시기는 군부 세력을 대표하던 가쓰라 다로와 번갈아 집권하던 이른바 '가쓰엔 시대(桂園時代)'로 불리며, 일본 근대 정치가 번벌 정치에서 정당 정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내정에서는 교육 개혁과 경제 발전에 힘썼고, 외교적으로는 온건한 확장 노선을 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인 1919년, 사이온지는 일본 측 수석 전권대사로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이 회의를 통해 일본이 국제 사회의 주요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했으며, 국제 연맹의 창설과 영미 협조 노선을 지지했다. 비록 회의 과정에서 일본 내 강경파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기본적으로 국제 협력을 통해 일본의 국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국제주의자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이토 히로부미 등 초기 메이지 원훈들이 사망한 후, 사이온지는 사실상 일본의 마지막 원로(元老)로서 국정의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천황에게 다음 내각총리대신 후보를 추천하는 권한을 가졌으며, 이를 통해 헌법 정신에 부합하는 정당 내각이 구성되도록 애썼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그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억제하고 의회 정치를 수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군국주의와 초국가주의가 대두하면서 사이온지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만주사변과 5·15 사건, 2·26 사건 등을 거치며 그가 지향했던 자유주의적 질서와 정당 정치는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40년 91세를 일기로 그가 사망하면서 일본의 원로 제도는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그의 죽음은 일본이 국제 협력과 의회 민주주의의 시대를 뒤로하고 전면적인 전쟁의 길로 접어드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