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총관부(東寧總管府)는 고려 후기 원 간섭기에 원나라가 고려의 서경(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계(北界)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던 행정 기관이다. 1269년(원종 10) 서경의 관리였던 최탄(崔坦)과 한신(韓愼) 등이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킨 뒤, 서경을 포함한 북계 60여 성과 자비령 이북의 땅을 원나라에 바치며 투항한 것이 설치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원나라는 이듬해인 1270년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개칭하고 총관을 두어 관리하게 함으로써 고려의 영토를 자국의 직할령으로 편입시켰다.
동녕총관부의 설치는 당시 무신정권의 붕괴와 몽골과의 강화가 이루어지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발생했다. 최탄 등은 고려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으며, 원나라는 이를 수용함으로써 고려를 군사적·정치적으로 압박하는 거점을 확보했다. 원은 자비령을 경계로 삼아 그 이북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이는 고려의 주권과 영토 보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였다.
고려 정부는 동녕총관부 설치 이후 원나라에 지속적으로 해당 지역의 반환을 요구했다. 원나라는 고려와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290년(충렬왕 16) 동녕부를 요동(遼東)의 의주(義州) 지역으로 옮겼다. 이로 인해 서경을 포함한 한반도 내부의 영토는 고려의 행정권 아래로 복귀되었으나, 동녕부라는 조직 자체는 요동에서 계속 존속하며 고려의 북방 접경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변수로 남았다.
14세기 중반 원나라의 국력이 쇠퇴하자 고려 공민왕은 과감한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다. 1370년(공민왕 19) 공민왕은 이성계와 지용수 등으로 하여금 요동에 남아 있던 동녕부를 정벌하게 했다.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의 거점이었던 우라산성을 함락시켰으며, 동녕총관부의 실질적인 세력을 무력화시켰다. 이 정벌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 북방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동녕총관부는 쌍성총관부, 탐라총관부와 함께 원나라가 고려의 영토를 탈취하여 직접 지배했던 대표적인 기구였다. 이 기관의 존재는 고려 후기 국가적 위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이후 고려가 상실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전개한 일련의 영토 회복 운동과 자주성 수호 노력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동녕총관부의 설치와 소멸 과정은 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응하는 고려의 외교 및 군사적 역량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