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시

김명시(金明時, 1907년~1949년)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여성주의자이자 무장 투쟁에 앞장선 항일 군인이다. 중국 태항산 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며 ‘백마 탄 여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일제강점기 내내 노동 운동과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며 조국의 해방과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해 헌신했으나, 광복 후 이념 갈등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난 김명시는 일찍부터 반일 의식과 평등사상을 접하며 성장했다. 오빠 김형선과 동생 김형윤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남매’로 유명하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마산 야초 세포에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했고, 이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사회주의 이념과 투쟁 방식을 수학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단순한 이념을 넘어 일제의 식민 지배를 타파하고 가부장적 억압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실천적 도구였다.

유학을 마친 후 1930년 중국 상하이로 파견된 김명시는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파업을 주도하는 등 항일 노동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2년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신의주 형무소 등에서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혹독한 고문과 긴 수감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향을 거부했으며, 1939년 만기 출소한 직후 곧바로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의 최전선으로 향했다.

중국으로 넘어간 김명시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활동하며 항일 무장 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합류하여 화북 지역을 무대로 활약했다. 그는 총을 들고 직접 전투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적진에 침투하여 선전전을 펼치고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들을 탈출시켜 독립군으로 편입시키는 적후방 공작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백마를 타고 전장을 누비는 그의 모습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으며, 이때 '백마 탄 여장군'이라는 전설적인 호칭을 얻게 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온 김명시는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 서울 귀환 후에는 조선부녀총동맹의 결성을 주도하고 공동위원장을 맡으며, 남녀평등과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대중 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미군정 산하에서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그의 활동도 큰 제약을 받았다. 1949년 9월, 이승만 정권의 경찰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김명시는 서울 아현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경찰은 옷깃을 찢어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으나, 당시 정황상 고문치사 혹은 암살이라는 의혹이 짙다.

김명시의 삶과 공적은 해방 이후 남북한 양쪽의 이념 대립과 냉전 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금기시되었고, 북한에서도 숙청된 연안파와 관련이 있어 배제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학계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었다. 마산 지역 시민들의 오랜 서명 운동과 국가보훈처의 재심사 끝에, 사망한 지 73년 만인 2022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며 마침내 독립유공자로 공식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