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년

1505년은 서력으로 16세기의 다섯 번째 해이며, 육십갑자로는 을축년(乙丑年) 소의 해에 해당한다. 한국사에서는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 11년, 중국사에서는 명나라 효종 홍치 18년이자 무종 정덕 원년, 일본사에서는 에이쇼(永正) 2년에 해당한다. 이 해는 동아시아와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서 장기간 통치했던 군주들이 사망하고 새로운 통치자가 등장하거나, 기존 권력의 폭주가 극에 달하는 등 정치적 변환점이 된 시기였다.

조선에서는 연산군의 폭정이 정점에 달하여 국가 통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던 시기였다. 1504년 발생한 갑자사화의 여파로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신진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 일부가 제거되자, 연산군은 사헌부와 사간원 같은 언론 기관의 기능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특히 1505년에는 신하들의 간언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신언패(愼言牌)를 관리들에게 의무적으로 착용하게 하여 공포 정치를 강화했다. 또한 채홍사를 파견해 전국의 미녀를 징발하고 국고를 탕진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지속했는데, 이러한 실정은 이듬해인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중국 명나라에서는 명 중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홍치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정덕제가 황제로 즉위했다. 홍치제는 근면하고 유교적인 도덕 정치를 펼쳐 명나라의 사회적 안정을 이룩한 명군으로 평가받았으나, 1505년 그의 죽음과 함께 안정기는 막을 내렸다. 뒤를 이은 정덕제는 즉위 직후부터 환관 유근 등 '팔호(八虎)'라 불리는 환관 세력을 중용하고 국정보다는 유희와 사냥에 몰두하는 성향을 보였다. 1505년은 명나라가 홍치제의 선정에서 정덕제의 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점으로, 이후 명나라 정치가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단초가 마련된 해이기도 하다.

러시아 역사에서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기틀을 확고히 다진 이반 3세가 사망하고 바실리 3세가 그 뒤를 이었다. 이반 3세는 재위 기간 동안 몽골(킵차크 한국)의 지배로부터 러시아를 완전히 독립시키고, 노브고로드 공화국 등 주변 국을 병합하여 영토를 대폭 확장함으로써 '대제'라는 칭호를 얻은 인물이다. 1505년 그의 사망은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은 상태에서 권력이 이양되었음을 의미하며, 아들 바실리 3세는 부왕의 유산을 이어받아 중앙 집권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와 관련해서는 포르투갈의 인도양 진출이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 해이다.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는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를 초대 인도 총독으로 임명했다. 알메이다는 1505년 20척 이상의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리스본을 출발하여 아프리카 동해안의 킬와, 몸바사 등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요새를 구축했다. 이는 단순한 무역 항로 개척을 넘어, 인도양 무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포르투갈의 해상 패권을 확립하기 위한 군사적 팽창이 본격화되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