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7년

1337년은 율리우스력으로 수요일에 시작된 평년으로, 14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중대한 분쟁 중 하나인 백년전쟁이 발발한 해이다. 서유럽에서는 중세 봉건 제도의 모순이 국가 간의 전면전으로 폭발하였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원나라의 쇠퇴와 고려 및 일본의 정치적 격변이 지속되었다. 이 해는 중세 사회가 근대적 국가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겪은 진통과 변화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유럽 역사에서 1337년은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의 긴장 관계가 임계점을 넘은 해로 기록된다. 5월 24일,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내 영토인 아키텐(가스코뉴) 공국에 대한 봉건적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해당 영토의 몰수를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섰으며, 이에 대항해 10월 7일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필리프 6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로써 1453년까지 이어지는 백년전쟁의 서막이 올랐으며, 이는 유럽의 정치 지형도와 전술, 민족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아시아의 한반도에서는 고려 제27대 국왕인 충숙왕의 복위 시대(1332~1339)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기에 놓여 있었으며, 충숙왕은 아들 충혜왕이 폐위된 후 원나라에 의해 다시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적 의욕을 잃고 국정 운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337년경 고려 사회는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과 수탈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있었고, 원나라에 바치는 공녀와 공물 문제로 인해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원나라는 혜종(타환 첩목아)의 통치 하에 있었으나 국운이 점차 기울어가고 있었다. 1337년에는 광동과 호광 지역 등지에서 주광경, 봉양예 등이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비록 원나라 조정에 의해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민란은 몽골 지배층의 부패와 가혹한 세금 징수, 그리고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는 훗날 홍건적의 난이 발생하고 원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전조 현상으로 해석된다.

일본은 남북조 시대의 내란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와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옹립한 북조 사이의 군사적 대립이 지속되었다. 1337년, 고다이고 천황은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각지로 황자들을 파견하여 지지 세력을 규합하려 했으나, 북조 측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고전하고 있었다. 특히 가네나가 친왕이 규슈로 파견되는 등 지방 세력을 포섭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무로마치 막부의 기반은 점차 공고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경제 및 사회사적 측면에서 1337년은 플랑드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된 해이기도 하다. 당시 플랑드르는 프랑스 왕의 봉토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잉글랜드산 양모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백년전쟁의 발발과 함께 잉글랜드가 양모 수출을 금지하자 플랑드르의 모직물 산업은 위기를 맞았다. 이에 겐트의 상인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는 도시 반란을 주도하여 프랑스에 대항하고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 등, 전쟁이 단순한 왕조 간의 다툼이 아니라 경제적 이권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