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은 1811년(순조 11) 평안도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란으로,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과 지역 차별에 항거한 대표적인 민중 봉기다. 이 난의 가장 큰 원인은 세도 정치의 심화에 따른 지배층의 수탈과 서북 지역(평안도)에 대한 오랜 차별 대우였다. 평안도 지역은 경제적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 출신 인사들은 중앙의 관직 등용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으며 이른바 '평안도 놈'이라는 멸시를 받았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몰락 양반인 홍경래를 중심으로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등이 결속하여 난을 일으켰다.
봉기 주도층은 상업 자본가, 광산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을 포섭하며 수년간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다. 홍경래는 스스로를 ‘평서대원수’라 일컬으며 가산의 다복동을 거점으로 삼아 1811년 12월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나섰다. 반란군은 가산을 시작으로 박천, 정주, 곽산 등 청천강 이북의 8개 고을을 순식간에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들은 격문을 통해 서북인에 대한 차별을 규탄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비판하며 민심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반란군의 초기 기세에 놀란 중앙 정부는 박기풍을 양서순무사로 임명하고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했다. 정부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반란군은 송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정주성으로 후퇴하여 장기 농성전에 돌입했다. 정주성에서의 항전은 4개월 넘게 이어졌으며, 성안의 반란군과 백성들은 식량 부족과 추위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정부군이 성벽 아래로 굴을 파고 화약을 터뜨려 성벽을 무너뜨리는 작전을 성공시키면서, 1812년 4월 결국 정주성은 함락되었고 홍경래는 전사했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조선 왕조의 지배 체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국가의 수탈 구조에 맞선 민중의 조직적인 저항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평안도라는 특정 지역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층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신분제의 동요를 입증했다. 이 난의 경험과 정신은 이후 1862년 임술농민봉기로 이어지는 등 조선 후기 민중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