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술농민봉기는 1862년(임술년) 전라도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농민 반란이다. 이 봉기는 조선 후기 농민들이 직면한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에 대한 저항으로, 토지의 불공정한 분배와 세금 부담, 그리고 지배 계층의 착취가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봉기는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농민들은 기구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일어섰다.
봉기의 배경에는 조선 후기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가 있었다. 당시 사회는 지주와 농민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발생했던 기근과 자연재해가 더해지면서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특히, 고율의 세금 부과와 공적인 노동력 동원은 농민들의 생계를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이 봉기로 이어졌다.
임술농민봉기는 그 자체로 한 차례의 반란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오래도록 남았다. 농민들은 "탐관오리(탐욕스러운 관리)"를 처벌하고, 세금 경감과 토지 분배의 공정성을 요구했다. 봉기의 지도자인 최익현과 같은 인물들은 농민들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이들은 봉기의 의미를 되새기며 후세에 전해졌다.
봉기는 결국 국가의 군사력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농민들의 저항은 조선 후기에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조선 사회의 계급 구조와 농민의 처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사례로 남았으며, 이후 농민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임술농민봉기는 한국 역사에서 민중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후 농민운동과 사회 개혁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