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함(中山艦)은 20세기 초 중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포함이자 해방함이다. 본래 이 군함은 1910년 청나라 정부가 일본 미쓰비시 조선소에 발주하여 건조한 것으로, 당시의 이름은 영풍함(永豊艦)이었다. 배수량은 약 780톤, 전장은 약 62.5미터였으며, 1912년 중화민국 정부에 인도된 이후 주로 연안 방어와 내륙 수로 순찰 임무를 맡았다.
이 군함이 역사적 상징성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중화민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쑨원)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1922년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문은 영풍함으로 피신하여 약 50일 동안 함상에서 항거하며 위기를 넘겼다. 1925년 손문이 서거한 후, 광동 국민정부는 그의 혁명 정신을 기리고자 영풍함의 명칭을 손문의 호인 '중산'을 따서 중산함으로 개칭하였다.
중산함은 1926년에 발생한 '중산함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었던 장개석은 중산함의 이동을 자신에 대한 공산당의 음모로 간주하고 함장을 체포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다. 이 사건은 장개석이 국민당 내 실권을 장악하고 제1차 국공합작이 분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 현대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변곡점으로 평가받는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중산함은 양자강 수로를 방어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938년 무한 보위전 당시 중산함은 호북성 무한 인근의 금구 수역에서 일본 항공기의 대규모 폭격을 받았다. 격렬한 교전 끝에 함장 사사준을 비롯한 수많은 승조원이 전사하였으며, 중산함은 양자강 바닥으로 침몰하였다. 이는 중국 해군 항전사에서 기록적인 희생 중 하나로 남았다.
침몰한 지 약 60년이 지난 1997년, 중국 정부는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중산함을 인양하였다. 인양된 함체는 수리 및 복원 과정을 거쳐 무한시에 건립된 중산함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현재 중산함은 중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증언하는 중요한 유물이자 국가지정 일급 문물로 관리되고 있으며, 당시의 전투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