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희(趙民熙, 1859~1931)는 조선 말기의 관료이자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으로,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비견될 만큼 친일 행적에 앞장선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임천이며, 자는 경빈(景斌), 호는 소취(小翠)이다. 여흥 민씨 세도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정계에 입문하였고, 대한제국 시기 주요 관직을 거치며 국권 침탈 과정에서 일본에 적극 협력하였다.
188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한 조민희는 승지, 이조참의, 내장원경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90년대 후반에는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후 법부대신과 탁지부대신 등을 지내며 중앙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는 고종과 순종의 측근에서 활동하며 황실의 신임을 얻었으나,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친일 행적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본격화되었다. 당시 승령부총관이었던 조민희는 고종의 강제 퇴위를 압박하는 데 가담하였으며, 이후 성립된 이완용 내각에서 법부대신을 맡아 정미7조약 체결을 지지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조약 체결 당시에는 궁내부대신으로서 황실을 설득하고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등 국권 상실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매국 행위를 주도하였다.
한일병합 이후 조민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령에 의거해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또한 5만 엔의 은사금을 받았으며,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으로 임명되어 매달 거액의 수당을 받으며 호의호식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내내 각종 친일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식민 지배 정당화와 일제의 전쟁 협력에 동원되는 등 반민족적 행위를 지속하였다.
1931년 사망할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그의 자작 작위는 아들 조중구에게 승계되었다. 광복 이후 조민희는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 조직된 반민특위의 조사 대상이었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현대에 이르러 '일제강점기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현지에 포함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에도 그 이름이 등재되어 대표적인 매국노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