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치하 이집트(1882-1952)는 이집트가 영국의 제국적 통치 아래 놓였던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으며, 이집트의 정치, 경제, 사회적 구조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882년, 영국은 이집트에 군사 개입을 하여 우르비 파샤의 반영국 봉기를 진압하고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이후 이집트는 형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지만,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운영되었다. 영국은 수에즈 운하의 전략적 중요성을 이유로 이집트를 차지했으며, 이는 영국의 인도 식민지와 유럽 간의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영국 치하의 이집트는 외교적으로는 영국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제한된 자치 정부가 존재했다. 이집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보호국으로 선포되었고, 전후에는 여러 차례의 정치적 불안과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였다.
이집트 내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강화되었고, 1923년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여전히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 이후에도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정치 세력이 등장했으며, 특히 Wafd당이 민족주의적 요구를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집트는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영국과의 관계가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1952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영국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였고, 결국 이집트는 1956년에 수에즈 전쟁을 통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영국 치하의 이집트는 현대 이집트의 역사와 정치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경제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경험은 이후 이집트의 국가 정체성과 독립운동에 대한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