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융

부여융(615년~682년)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이자 백제의 마지막 태자이다.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융(隆)이며, 의자왕의 아들들 중 문헌에 따라 장자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는 백제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태자로서 국정에 참여하였으나,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비운의 길을 걷게 된 인물이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여 사비성이 위협받자, 부여융은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결국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였으며, 사비성 낙성식에서 신라 무열왕과 김유신 앞에서 술을 따르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후, 그는 아버지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 귀족, 그리고 1만여 명의 백성과 함께 당나라의 수도인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부여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664년에 그를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백제 유민들을 다독이게 했다. 특히 665년에는 당나라의 압박 아래 취리산에서 신라 문무왕과 만나 화친을 맺는 이른바 '취리산 회맹'을 거행하였다. 이는 당나라가 한반도 내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신라와 백제 유민 간의 분쟁을 중재하려 한 시도였다.

하지만 신라의 세력이 커지고 나당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부여융의 입지는 급격히 좁아졌다. 백제 유민들의 저항과 신라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그는 결국 백제 고토로 돌아가지 못하고 당나라로 다시 소환되었다. 당나라는 그에게 대방군왕이라는 작호를 내리며 형식적으로 우대하였으나, 이는 실권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부여융은 682년 당나라 낙양에서 6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삶은 망국의 왕족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당나라의 동북아시아 정책 속에서 이용당했던 비극적인 역사를 잘 보여준다. 1920년대 중국 낙양 인근에서 그의 생애를 기록한 '부여융 묘지명'이 발견됨으로써,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그의 구체적인 행적과 사망 시기 등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