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년

664년은 한반도 정세에서 백제 부흥 운동이 사실상 종결된 직후의 시기로, 나당 연합군이 한반도 내 패권을 공고히 하던 시점이다. 전년도인 663년 백강 전투에서 왜의 지원군을 격파한 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옛 땅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유민을 관리하는 한편, 신라와의 관계를 조율하며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신라 문무왕 4년인 이해에 당나라는 백제의 옛 태자 부여융을 앞세워 신라와 화친을 맺게 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이는 당나라가 신라의 독주를 견제하고 백제 유민 세력을 회유하여 자국 중심의 지방 통치 질서를 확립하려 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되었다. 신라는 이러한 당의 움직임에 표면적으로는 협조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백제 영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행정적 조치를 병행했다.

일본(당시 왜)에서는 백강 전투의 참패 이후 당과 신라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한 국가 비상 방어 체제 구축이 본격화되었다. 664년에 일본은 쓰시마섬, 이키섬, 규슈 북부 등지에 방인(防人)과 봉수를 설치하여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특히 다자이후 인근에 거대한 둑인 수성(水城)을 쌓아 방어선을 형성했는데, 이는 외부 세력의 침입에 대비한 대대적인 토목 공사였다. 이러한 긴박한 정세 속에서 일본은 백제 유민들을 수용하고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계기를 맞이했다.

당나라에서는 동아시아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고승 현장(玄奘)이 664년 2월에 입적하였다. 현장은 인도로부터 대량의 불교 경전을 가져와 번역함으로써 한역 불전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였으며, 그의 죽음은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와 불교계에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한편, 당 고종의 치세하에서 측천무후의 정치적 영향력이 갈수록 증대되면서 당의 내부 권력 구조는 큰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었다.

서구권에서는 영국 노섬브리아 왕국의 휘트비 수도원에서 열린 '휘트비 공의회'가 종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회의에서 켈트 기독교 전통과 로마 가톨릭 전통 사이의 갈등이 다루어졌으며, 결과적으로 로마식 부활절 날짜 계산법과 삭발 의식을 따르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영국 교회가 로마 교황청의 체계 아래 통합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중세 유럽의 문화적·종교적 통일성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