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포로(Prisoner in the Vatican)는 1870년부터 1929년 사이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교황령을 상실한 교황이 스스로를 지칭한 표현이다. 이 시기는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점령하며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이 붕괴된 시점부터 라테란 조약을 통해 바티칸 시국이 독립을 인정받기까지의 약 60년간을 의미한다. 이는 교황권과 근대 민족 국가 사이의 권력 투쟁과 갈등을 상징하는 역사적 용어이다.
사건의 발단은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인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에서 비롯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로마를 수호하던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로마를 점령하고 이탈리아의 통일을 완성했다. 당시 교황 피우스 9세는 세속 영토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라는 이탈리아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바티칸 궁전 내부로 은신했다. 그는 자신을 '부당하게 영토를 찬탈당한 포로'라고 선언하며 이탈리아 정부와의 모든 공식적인 관계를 단절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1871년 '보장법'을 제정하여 교황의 신변 안전과 연금 지급, 바티칸 및 라테란 궁전의 사용권 등을 제안했으나 피우스 9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이탈리아 왕국을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탈리아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는 '논 엑스페디트(Non Expedit)' 칙령을 내렸다. 이후 피우스 9세의 뒤를 이은 레오 13세, 피우스 10세, 베네딕토 15세 역시 바티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불복종 태도를 고수하며 스스로를 가두었다.
이 기간 동안 교황청과 이탈리아 국가 간의 대립은 국제 사회의 주요한 외교적 문제였다. 교황은 영토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권위와 외교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의 처지에 동정적인 여론을 형성했다. 약 60년 동안 교황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외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축복을 내리는 관례조차 중단할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이탈리아 정부의 정통성에 도전했다.
오랜 대치는 1929년 2월 11일, 교황청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부 사이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교황청은 로마를 이탈리아의 수도로 인정하고 과거 교황령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바티칸 시국이라는 독립적인 주권 국가를 설립할 권리를 얻었다. 또한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영토 상실에 대한 재정적 보상을 받았으며 가톨릭교를 국교로 공인받았다. 이로써 '바티칸 포로'의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고, 교황은 다시금 국제법상의 주권자로서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