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9년

799년은 서력 기원으로 8세기의 99번째 해이며, 8세기의 마지막 해를 앞둔 시점이다. 한반도의 신라에서는 소성왕 원년, 발해는 강왕의 정력 5년, 중국 당나라는 정원(貞元) 15년, 일본은 엔랴쿠(延曆) 18년에 해당한다. 이 해는 동아시아와 유럽의 역사에서 각기 다른 정치적, 문화적 전환점이 되는 사건들이 발생한 시기로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역사에서 799년은 통일신라 제39대 국왕인 소성왕의 통치가 시작된 해이다. 전 해인 798년 말 원성왕이 사망함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소성왕은 799년 정월에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소성왕은 즉위 후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 관료들의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주는 등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다. 또한, 5월에는 부왕인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목탑을 세우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중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소성왕은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았으나, 이 시기는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기 직전의 과도기적 성격을 띤다.

일본 역사에서는 외래 문물의 유입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후기》의 기록에 따르면 799년 미카와국(현재의 아이치현 동부)에 곤륜인(崑崙人)으로 불리는 외국인이 표류해 도착했다. 이 인물은 천축(인도) 혹은 동남아시아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그가 가지고 온 것 중에 목화씨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일본에 목화가 처음 전래된 기록으로 여겨지나, 당시 기후 조건과 재배 기술 부족으로 인해 목화 재배가 정착되지는 못했다. 정치적으로는 간무 천황 치세 하에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에미시(동북 지방의 원주민) 정벌을 수행하던 시기였다.

유럽사에서는 중세 권력 구조의 판도를 바꿀 중요한 사건의 서막이 올랐다.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레오 3세가 반대파 귀족들의 습격을 받아 로마 거리에서 납치되어 눈과 혀를 잃을 뻔한 위기를 겪었다. 감금 상태에서 탈출한 레오 3세는 당시 서유럽의 패자였던 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가 머물던 파더보른으로 피신하여 보호를 요청했다. 799년에 이루어진 교황과 샤를마뉴의 이 만남은 서로마 제국의 부활과 중세 유럽의 질서 재편을 논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듬해인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마뉴가 서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중국 당나라는 덕종의 재위 기간인 정원 연간(785~805)의 후반부에 접어들어 있었다. 799년 당시 당나라는 안사의 난 이후 지방 절도사(번진)들의 세력이 비대해져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조정은 회서 절도사 오소 성 등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환관의 권력이 점차 강해지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799년은 8세기를 마감하며 다가올 9세기의 격변을 예고하는 다양한 역사적 흐름이 전 세계적으로 교차하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