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년은 서력기원 기준 3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해로, 율리우스력에서는 평년이다. 동아시아에서는 한반도의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지거나 영토 확장을 도모하던 시기였으며, 중국은 위(魏), 촉(蜀), 오(吳)가 대립하는 삼국시대였다. 서양에서는 로마 제국이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혼란기 속에서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 해는 특히 동아시아 역사에서 고구려와 위나라 간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 격화된 해로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245년은 고구려 동천왕 통치기에 일어난 조위(曹魏)와의 전쟁이 중대한 국면을 맞이한 해이다. 전년도인 244년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는 큰 타격을 입었다. 245년 관구검은 위나라 장수 왕기(王頎)를 보내 동천왕을 옥저 깊숙한 곳까지 추격하게 했다. 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고구려의 장수 밀우(密友)와 유유(紐由) 등의 결사적인 항전과 희생으로 동천왕은 간신히 목숨을 구하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위나라 군대는 결국 철수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는 한동안 국력의 손실을 겪었으나, 이후 수도를 평양성으로 임시 천도하며 국가를 재건하게 된다.
같은 시기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신라 역시 각자의 체제 정비와 영토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백제는 고이왕이 재위하던 시기로,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의 기틀을 치열하게 마련해 나가고 있었다. 고이왕은 주변의 마한 소국들을 병합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력 강화에 힘썼다. 신라는 조분 이사금의 통치기였으며,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이 늦었으나 주변 소국을 복속시키고 왜(倭) 등 외부 세력의 잦은 침입에 대비하며 국방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중국의 삼국시대는 각국의 내부 정치적 변동이 서서히 일어나는 시기였다. 위나라에서는 황제 조방(曹芳)이 재위 중이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을 두고 사마의(司馬懿)를 중심으로 한 사마씨 가문과 대장군 조상(曹爽) 세력 간의 암투가 깊어지고 있었다. 촉한에서는 제갈량 사후 장완(蔣琬)과 비의(費禕)가 국정을 이끌며 무리한 북벌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방어적이고 안정적인 국가 운영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오나라의 손권(孫權)은 치세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태자 손화(孫和)와 노왕 손패(孫霸) 간의 극심한 궁중 파벌 싸움인 '이궁의 변(二宮之變)'으로 인해 심각한 정치적 혼란과 국력 낭비를 겪고 있었다.
서양의 로마 제국은 아라비아 출신의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재위 244~249년)가 다스리고 있었다. 244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불리한 평화 조약을 맺고 로마로 귀환한 황제는 245년 다뉴브(도나우) 강 전선으로 눈을 돌려 카르피인(Carpi)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군사력을 집중했다. 필리푸스 황제는 다뉴브 전선에서의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으며, 다가오는 로마 건국 1000년(248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며 제국의 결속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은 경제적 쇠퇴와 국경의 불안정이라는 3세기의 구조적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