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9년

1149년은 12세기의 중엽에 해당하는 해로, 육십간지로는 기사(己巳)년이다. 서양의 서력기원과 동양의 단기, 그리고 각국의 독자적인 연호가 혼용되던 시기였으며, 동양에서는 고려의 의종, 금나라의 희종과 해릉왕, 남송의 고종이 통치하고 있었다. 이 해는 중세 봉건 질서 속에서 각국의 내부 정비와 영토 분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점이었다.

고려 왕조에서는 제18대 국왕 의종이 재위 3년을 맞이한 해였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지 십여 년이 지난 시점으로, 개경파 문벌 귀족들의 권력이 공고해진 상태였다. 의종은 즉위 초반 문신들을 중용하며 유희와 연회를 즐기는 성향을 보였으나, 기록에 따르면 1149년에도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응하여 죄수를 사면하거나 구휼 정책을 펴는 등 민심을 달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무신에 대한 차별적 대우와 문신 중심의 정치 구조는 이 시기에도 지속되어 훗날 무신정변의 잠재적 원인이 축적되고 있었다.

중국 북부의 금나라에서는 권력 구조의 급격한 변동이 발생한 역사적인 해였다. 금나라의 제3대 황제 희종은 통치 말기에 폭정을 일삼고 충신들을 살해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완안량(해릉양왕)이 1149년 12월에 희종을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해릉왕의 즉위는 금나라 내부의 권력 중심축이 이동하고, 이후 수도를 연경(베이징)으로 옮기며 중앙집권화를 강력히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동과 유럽 지역에서는 제2차 십자군 전쟁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었다. 1148년 다마스쿠스 포위 공격에 실패한 십자군 세력은 위축되었으며, 1149년 6월 29일에는 이나브 전투(Battle of Inab)가 벌어졌다.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공작 레이몽을 전사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은 시리아 지역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잡게 되었고, 십자군 국가들은 생존을 위협받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럽 대륙 내부에서는 봉건 영주들 간의 분쟁과 왕권 강화를 위한 움직임이 병행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스티븐 왕과 마틸다 사이의 내전인 '무정부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와 영토 관리와 왕권 안정에 주력했다. 전반적으로 1149년은 중세 시대의 종교적 열망이 군사적 패배로 인해 좌절을 겪는 동시에,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기존의 권력 체계가 재편되거나 새로운 갈등이 잉태되던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