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인 사건

105인 사건은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항일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당시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혐의를 씌워, 민족 운동 단체인 신민회의 간부와 회원들을 대거 체포하고 처벌하였다. 이 사건은 신민회를 해체하고 한국인의 항일 의지를 꺾으려는 일제의 의도적인 기획 아래 진행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910년 안명근이 독립 자금을 모으다 체포된 '안악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일제는 이를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으로 확대 포장하여 서북 지방의 기독교 세력과 신민회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일제 경찰은 600여 명에 달하는 인사를 연행하였으며, 이 중 상당수가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지식인 및 독립운동가였다.

체포된 이들은 가혹한 고문과 협박을 당하며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다. 일제는 고문을 통해 받아낸 허위 진술을 근거로 123명을 기소하였고, 1심 판결에서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 105명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이로 인해 이 사건은 '105인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임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묵살하고 재판을 강행하였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선교사들이 일제의 고문 수사와 인권 침해 실태를 서구 사회에 폭로하면서 일본의 식민 통치 방식에 대한 비판 여론이 형성되었다. 결국 항소심과 고등법원을 거치며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대부분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윤치호 등 핵심 인물 6명은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하였다.

105인 사건은 한국 근대사에서 일제가 조작한 대표적인 공안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 사건의 결과로 비밀 결사 조직이었던 신민회는 사실상 해산되었고, 국내에서의 조직적인 항일 운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많은 독립운동가가 해외로 망명하여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