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쿠프 대공국(Grand Duchy of Krakow)은 184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이었던 영토이다. 이 지역은 원래 1815년 빈 회의의 결과로 성립된 크라쿠프 자유시였으나, 1846년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크라쿠프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병합과 동시에 오스트리아 황제는 '크라쿠프 대공'의 작위를 겸하게 되었으며, 이전까지 누렸던 자치권은 크게 축소되었다.
행정적으로 크라쿠프 대공국은 오스트리아의 속령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비록 대공국이라는 독자적인 명칭과 군주의 칭호는 유지되었으나, 실제 통치 체제상으로는 갈리치아 왕국의 일부로서 관리되었다. 이는 폴란드의 독립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던 당시 유럽 열강들의 정치적 목적이 반영된 결과였다. 대공국 내의 행정 관료 체계는 초기에는 독일화되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중앙 집권적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1840년대 후반부터 1850년대까지 대공국 내에서는 강력한 중앙 집권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공용어로서 독일어 사용이 강요되었고 교육 체계 또한 오스트리아식으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 제국 내 분권화가 진행되면서, 크라쿠프를 포함한 갈리치아 지역은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폴란드어의 공식 사용이 다시 허용되었고, 폴란드인들이 지역 행정을 주도하며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크라쿠프 대공국 시기의 크라쿠프는 폴란드 민족의 문화적, 정신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지속했다. 비록 정치적 독립은 잃었으나, 야기엘론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전통과 바벨 성을 비롯한 역사적 유산은 폴란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핵심 요소였다. 특히 러시아나 프로이센 점령지 내의 폴란드인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았던 것과 달리, 19세기 후반의 크라쿠프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예술과 학문이 번창하여 폴란드의 정신적 유산을 보존하는 보루가 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크라쿠프 대공국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18년 폴란드가 다시 독립을 선언하며 제2공화국을 수립함에 따라, 크라쿠프는 새롭게 탄생한 폴란드 국가의 핵심 도시로 편입되었다. 대공국이라는 행정적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으나, 이 시기에 축적된 문화적 자산과 민족적 역량은 현대 폴란드 국가 형성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