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화(崔時和, 1858~1918)는 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에 만주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다. 그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만주로 망명하여 한인 사회의 자치와 민족 교육, 그리고 무장 항일 투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1900년대 초반 북간도 연길현(延吉縣)으로 이주한 최시화는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독립의 근간이라는 신념하에 교육 사업에 매진하였다. 그는 동북 지역의 여러 한인 마을을 순회하며 학교 설립을 독려하였으며, 스스로도 교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근대적 지식을 전수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훗날 북간도 지역이 항일 운동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최시화는 보다 직접적인 자치 활동과 독립운동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는 북간도 한인들의 자치 단체인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와 그 후신인 간민회(墾民會)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하며 한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일제의 침략 세력에 맞섰다. 특히 중국 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한인들의 거주권과 경작권을 확보하는 등 동포 사회의 안정을 위해 힘썼다.
그는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0년대 중반 독립운동 단체인 중명단(重明團)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중명단은 일제의 밀정과 친일 분자들을 처단하고 독립군 자금을 모집하는 등 강력한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시화는 일제의 만주 영사관 및 친일 단체인 보민회(保民會)와 날카롭게 대립하며 그들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1918년 최시화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 분자들에 의해 암살당하여 서거하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북간도 독립운동 진영에 큰 손실을 안겨주었으나, 그가 생전에 이룩한 교육적 성과와 조직적 기반은 이후 1920년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등 대규모 무장 독립 전쟁의 정신적·물질적 자양분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