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사태는 1991년 5월 경상남도 창원시의 창원국가산업단지를 중심으로 발생한 대규모 노동자 연대 파업과 격렬한 가두 시위를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당시 노태우 정부의 공안 통치와 노동 운동 탄압에 맞서 일어난 전국적인 '5월 투쟁'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였으며, 한국 노동운동 역사에서 지역 연대 투쟁의 정점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1991년 5월 6일,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병원 마당에서 의문의 사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당시 경찰은 그가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으나, 노동계는 강압적인 수사와 공권력에 의한 살해 의혹을 제기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특히 박창수가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탈퇴 강요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창원 지역의 노동자들은 박창수의 죽음을 단순한 사고가 아닌 노동 운동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했다. 대우중공업, 한국중공업, 금성사, 삼성중공업 등 창원공단 내 주요 대기업 노조들이 가세하여 전면 파업에 돌입했으며, 수만 명의 노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박창수 열사 의문사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쟁취'를 외치며 창원 시청 광장과 공단 일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정부는 공권력을 대거 투입하여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가는 격렬한 충돌이 연일 이어졌으며, 창원 시내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경찰은 주요 사업장에 진입하여 노조 간부들을 연행하고 해산을 시도했으나, 노동자들은 인근 상가와 주택가의 지지를 받으며 장기 항전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고 수백 명의 노동자가 구속되는 등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가 막대했다.
창원사태는 비록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표면적인 시위는 잦아들었으나,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을 비약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훗날 민주노총 건설의 토대가 되었으며, 단위 사업장을 넘어선 지역별·업종별 연대 투쟁의 모델을 제시했다. 또한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이행기에서 노동 문제가 핵심적인 사회적 의제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