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요동정벌은 1370년(공민왕 19년) 고려가 요동 지역의 원나라 잔존 세력을 축출하고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단행한 군사 행동이다. 당시 국제 정세는 명나라가 건국되어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있었으며, 고려 공민왕은 이러한 전환기를 틈타 친명 정책을 표방하며 북진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요동은 고구려의 옛 영토라는 역사적 상징성과 함께 고려의 안보를 위협하는 북원 세력의 거점이었기에 정벌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정벌의 직접적인 배경은 요동 지역에 잔류하며 고려의 국경을 위협하던 북원의 동녕부 세력이었다. 1369년 고려는 이미 동녕부를 한 차례 공격하여 기철의 아들 기사이안부다를 패퇴시킨 바 있다. 그러나 요동 지역의 불안정이 지속되자 공민왕은 1370년 이성계와 지용수를 중심으로 대규모 정벌군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요동 진공을 명령했다.
1370년 1월, 이성계는 1,500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격했다. 이성계의 부대는 오로산성(우라산성)을 포위하고 원나라 요동 관리였던 고가노의 항복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11월에는 지용수, 이성계, 양백익 등이 이끄는 주력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핵심 거점인 요양을 공격했다. 고려군은 요양을 점령하고 북원의 요동 경영 중심지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요동 점령 직후 고려군은 현지인들에게 고려의 영토임을 선포하고 민심을 수습하려 했으나, 군량 보급의 한계와 혹독한 추위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장기 체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고려군은 결국 요양에서 철수하여 귀환했다. 비록 영토의 완전한 편입이라는 목표를 장기적으로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이 정벌을 통해 동녕부 세력을 일소하고 고려의 군사적 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1차 요동정벌은 고려 후기 자주국방 의지와 북진 정책의 결실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을 통해 이성계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증명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는 훗날 그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진 제2차 요동정벌 시도와는 달리, 고려 정부의 주도하에 실제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토 회복의 의지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