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첨

정성첨(鄭成瞻, 1664~1736)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개숙(介叔), 호는 귀암(歸巖)이다. 아버지는 증 좌찬성 정수기(鄭壽期)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증손녀인 전주 이씨이다. 그는 숙종, 경종, 영조에 이르는 세 임금을 보필하며 조정의 여러 요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1699년(숙종 2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승정원 주서, 예문관 검열 등 사관의 직무를 수행하며 정직한 기록을 남기는 데 주력하였다. 이후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거치며 언관으로서 조정의 잘못을 비판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경종 대에는 당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소론 세력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대사간의 직위에 올라 당시 노론과 소론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려 노력하였으며, 국정의 안정과 왕권의 확립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특히 신임사화(辛壬士禍) 등 정국이 급변하는 시기에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관료로서의 소명을 다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이후에는 소론의 온건파인 완론(緩論)의 입장을 견지하며 탕평책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일조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발생했을 때 소론 일부가 가담하여 정치적 위기가 닥쳤으나, 그는 반란 진압에 협조하고 조정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왕의 신임을 유지하였다. 이후 대사헌, 공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지내며 국정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말년에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청백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후배 관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문장에도 능하여 다수의 시문과 상소문을 남겼는데, 그의 글은 논리가 정연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1736년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그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 위치하여 향토 유적으로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