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텔멘족(Itelmen)은 러시아 극동의 캄차카 반도에 거주하는 고대 시베리아 원주민 집단이다. 과거에는 캄차달(Kamchadal)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이는 러시아인들이 캄차카 지역의 토착민과 러시아인 혼혈을 통칭하여 부르던 말에서 유래했기에 현재는 이텔멘족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민족 명칭인 '이텔멘'은 그들의 언어로 '여기에 사는 사람' 또는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캄차카 반도의 서해안과 동해안의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착 생활을 영위해 왔다.
이텔멘족의 역사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러시아 코사크 탐험대와의 접촉을 통해 외부 세계에 구체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동진 정책과 팽창 과정에서 이텔멘족은 맹렬히 저항했으나, 우월한 화력을 앞세운 러시아의 정복 활동에 의해 복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복 전쟁뿐만 아니라 외부인들이 가져온 천연두, 인플루엔자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여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많은 이텔멘인이 러시아 농민이나 다른 원주민 집단과 통혼하며 문화적으로 러시아화되는 과정을 겪었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고유의 생활 방식이 상당 부분 변화하였다.
전통적인 이텔멘족의 경제와 생계 수단은 어업, 그중에서도 연어 잡이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다. 강은 이들의 삶의 터전이자 핵심적인 식량 공급원이었으며, 여름철에 잡은 연어는 건조하거나 발효시켜 겨울철 주식인 '유콜라(yukola)'로 가공해 저장했다. 어업 외에도 곰, 산양, 물범 등을 사냥하여 가죽과 고기를 얻거나, 야생 식물, 잣, 열매, 뿌리 등을 채집하여 식생활을 보완했다. 특히 캄차카 반도의 풍부한 식생을 활용한 채집 활동은 이텔멘족의 음식 문화와 약용 지식의 기반이 되었다.
종교 및 정신세계 측면에서 이텔멘족은 자연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을 숭상했다. 그들의 신화에서 가장 중심적인 존재는 세상을 창조했다고 여겨지는 까마귀 형상의 신 '쿠트(Kutkh)'이다. 쿠트는 캄차카의 지형을 만들고 인간에게 생존 기술을 가르쳐준 창조주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우스꽝스럽거나 교활한 면모를 보이는 트릭스터(Trickster)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매년 가을, 어업 시즌이 끝나면 수확에 감사하고 정화 의식을 치르는 전통 축제인 '알할라랄라이(Alkhalalalai)'를 개최하는데, 이는 현대에 들어와 이텔멘족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언어적으로 이텔멘어는 고아시아어족(Paleosiberian languages) 중 축치-캄차카어족의 먼 친척 관계에 있는 독자적인 분파로 분류된다. 그러나 소련 시대의 강제적인 러시아어 사용 정책과 급격한 사회적 변화로 인해 현재 유창한 모국어 화자의 수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며 심각한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오늘날 이텔멘족은 약 3,000명 내외의 인구가 남아있는 것으로 추산되며,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민족 부흥 운동을 통해 학교 교육과 문화 단체를 중심으로 언어 복원 및 전통문화 계승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