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1세(Mary I)는 튜더 왕조의 네 번째 군주이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여왕이다. 헨리 8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였다. 1553년부터 1558년까지 재위했으며,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권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여성 군주로 기록되어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부왕인 헨리 8세와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 시기를 거치며 진행된 종교 개혁을 되돌리고 가톨릭을 복원하는 데 주력했다.
메리 튜더의 초기 생애는 잉글랜드의 정치적, 종교적 격변과 궤를 같이한다. 부왕이 어머니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공주로서의 지위를 잃고 서출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한 직후 개신교 세력이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올리려 시도했으나, 메리는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를 진압하고 왕위를 탈환했다. 이는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국민적 열망이 반영된 사건이었다.
재위 기간 중 메리 1세는 반대 세력과 개신교도들을 강하게 탄압했다. 그녀는 잉글랜드 교회를 다시 로마 가톨릭의 교권 아래 두기 위해 개신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약 300여 명의 인사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이러한 가혹한 박해로 인해 그녀는 후대 사학자들로부터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심보다는 잉글랜드를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로 회귀시키려는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외 정책 면에서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여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동맹을 꾀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외국 세력의 간섭을 우려한 잉글랜드 귀족과 민중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스페인과의 동맹 관계로 인해 프랑스와의 전쟁에 휘말렸고, 그 결과 잉글랜드가 프랑스 대륙에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영토인 칼레(Calais)를 상실하는 실책을 범했다. 칼레의 상실은 그녀의 통치기에 큰 정치적 타격을 주었으며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메리 1세는 후계자를 얻지 못한 채 155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사후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잉글랜드는 다시 개신교 체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과거에는 그녀를 잔인한 폭군으로만 묘사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그녀의 관료 체제 정비와 경제 정책이 후대 엘리자베스 1세 치세의 안정을 다지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을 들어 다각적인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