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응규(盧應奎, 1861~1907)는 조선 말기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성집(聖集), 호는 신암(愼庵)이다. 경상남도 함양 출신인 그는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과 이어 공포된 단발령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896년 초, 노응규는 함양에서 의병을 소집하고 진주로 진격하였다. 그는 진주 관찰사 노제형을 처단하고 진주성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그가 이끌던 의병 부대는 경상도 일대의 유생과 농민들이 적극 가담하면서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후 경상도 좌우도 창의 도대장(慶尙道左右道倡義都大將)으로 추대되어 체계적인 군사 조직을 갖추고 일본군 및 관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지고 정세가 변하면서 의병 활동은 점차 위축되었다. 노응규는 끝까지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의병을 해산하고 잠적하였다. 이후 그는 전국을 유람하며 국권 회복을 위한 기회를 모색하였으며, 중국 망명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대외적인 연대를 통한 항일 투쟁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07년 정미칠조약 체결과 군대 해산으로 국운이 기울자 노응규는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을 규합하던 중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경성감옥에 수감된 그는 혹독한 고문과 회유 속에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켰으며, 옥중에서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1907년 12월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노응규는 유교적 가치관을 실천에 옮긴 정통 유학자 출신의 의병장으로서, 영남 지역 항일 의병 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불굴의 투쟁 정신과 애국심은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