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7년(고려 광종 8년)은 고려 왕조가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내부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광종은 전년도인 956년에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킨 데 이어, 왕권을 뒷받침할 새로운 관료 세력을 양성하고자 했다. 특히 후주(後周)에서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에 귀화한 쌍기(雙冀)의 영향력이 이 시기에 본격화되었으며, 이는 이듬해인 958년 과거 제도 시행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오대십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려는 후주(後周) 세종(世宗)의 정벌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957년 후주의 세종 시영은 남당(南唐)을 정벌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행동을 단행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당의 전략적 요충지인 수주(壽州)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후주는 회수(淮水) 이북의 땅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송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콘스탄티노스 7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에 동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외교적 사건이 발생했다. 키예프 루스의 섭정이었던 올가 대공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동로마 황제의 환대를 받은 시점이 95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올가는 이곳에서 기독교(정교회) 세례를 받았으며, 이는 키예프 루스가 기독교 문명권으로 편입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비록 루스 전체의 국교화는 이후의 일이지만, 올가의 개종은 북방 슬라브 사회에 기독교 문화가 확산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서유럽의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통치권을 둘러싼 내부적 분열이 일어났다. 당시 왕이었던 에드위(Eadwig)의 실정에 반발한 머시아와 노섬브리아의 귀족들은 957년 에드위의 동생인 에드가(Edgar)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템스강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 통치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할은 959년 에드위가 사망하고 에드가가 왕국 전체를 재통합하면서 종료되었으며, 에드가는 이후 '평화왕'으로 불리며 잉글랜드의 황금기를 이끌게 된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 무라카미 천황이 재위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는 율령제 정치가 쇠퇴하고 귀족 사회가 점차 장원 경제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권력을 키워가던 과정에 있었다. 전반적으로 957년의 세계는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중앙 집권적 권위를 세우려는 군주들의 노력과 그에 따른 제도의 변화, 그리고 종교적·문화적 교류를 통한 국가 정체성의 재확립이 동시에 진행되던 격동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