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년은 한국사의 후삼국 시대에 해당하며, 고려와 후백제, 신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발해가 멸망한 지 2년이 경과한 시점으로, 북방에서는 발해 유민들의 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한반도 내부에서는 후백제의 군사적 공세가 정점에 달해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오대십국 시대의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후당(後唐)이 중원의 주요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후삼국의 정세 측면에서 928년은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의 왕건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점하던 시기였다. 정월에 견훤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강주(지금의 경상남도 진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 후백제군은 오거진(梧居津)에서 고려군과 격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과정에서 고려의 장수 김상(金相)이 전사하는 등 고려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견훤은 이러한 승세를 바탕으로 낙동강 유역의 제어권을 확보하며 고려를 압박했다.
신라는 경순왕이 즉위한 지 2년째 되는 해로,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전년도인 927년 후백제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시해된 이후, 신라의 실권은 사실상 상실된 상태였다. 영토는 경주 주변 지역으로 크게 축소되었으며, 독자적인 군사 행동이 불가능해지자 신라는 고려에 적극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며 의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훗날 신라가 고려에 자발적으로 항복하는 복선이 되었다.
발해의 멸망 이후 유민들의 귀순도 928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다. 발해의 유민들은 요나라의 지배를 피해 대거 남하하여 고려로 유입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928년 여름, 발해의 유민들이 대규모로 고려에 투항하였으며 태조 왕건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토지와 가옥을 하사하며 포섭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유민 수용은 고려의 인구 증대와 국력 강화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계승 의식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사적으로는 서유럽에서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가 슬라브 족에 맞서 영토를 확장하고 마자르족의 침입에 대비하며 왕권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 제국과의 평화 조약을 통해 동부 전선의 안정을 꾀하고 있었으며, 이슬람 세계의 아바스 왕조는 중앙 집권력이 약화되면서 여러 지방 정권이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분열의 길을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