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째 날(Der neunte Tag)’은 2004년 개봉한 독일의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이 연출한 전쟁 드라마 영화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룩셈부르크 출신 가톨릭 사제 장 베르나르(Jean Bernard) 신부의 회고록 《Pfarrerblock 25487》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는 나치 정권 하에서 종교적 신념과 생존 본능, 그리고 도덕적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성직자의 9일간의 행적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하우 수용소의 ‘성직자 블록’에 수감되어 있던 앙리 크레머 신부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다는 명목으로 갑작스럽게 9일간의 휴가를 얻어 룩셈부르크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일시적인 석방 뒤에는 나치 친위대(SS) 장교 게브하르트의 정치적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 게브하르트는 크레머 신부에게 룩셈부르크의 주교를 설득하여 나치 정권에 협조하도록 만드는 임무를 부여하며, 이를 성공시킬 경우 완전한 석방과 자유를 약속한다. 만약 실패하거나 수용소로 복귀하지 않으면 수용소에 남겨진 동료 사제들이 처형될 것이라는 잔혹한 조건이 곁들여진다.
작품의 핵심은 크레머 신부와 게브하르트 장교 사이의 치열한 심리적, 신학적 논쟁이다. 신학을 공부했던 지식인 출신의 나치 장교 게브하르트는 성경 속 유다의 역할을 거론하며 악의 필요성과 나치 이념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크레머를 끊임없이 회유하고 압박한다. 이에 맞서는 크레머 신부는 주교를 설득해 나치 선전에 이용당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동료들이 있는 지옥 같은 수용소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 속에서 극한의 내적 고통을 겪는다. 영화는 화려한 전쟁 액션 대신 두 인물의 대화와 주인공의 고뇌하는 표정을 통해 긴장감을 유지한다.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여타 작품들과 달리, 나치 치하에서 가톨릭 교회가 겪었던 탄압과 그 안에서의 복잡한 입장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특히 다하우 수용소 내에 실제로 존재했던 성직자 전용 막사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는 상황에서 신앙의 의미가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슐렌도르프 감독은 감정적인 과잉을 절제하고 건조하고 차가운 톤으로 서사를 전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윤리적 선택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9번째 날’은 개봉 이후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뮌헨 영화제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주연 배우 울리히 마트헤스와 아우구스트 딜의 밀도 높은 연기력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전쟁 영화를 넘어, 전체주의 폭력 앞에 놓인 개인의 양심과 책임, 그리고 구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하는 수작으로 영화사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