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7년

787년은 8세기 후반에 속하는 해로, 율리우스력으로 월요일에 시작되는 평년이다. 서양사에서는 기독교 교리 논쟁의 중대한 분수령이 된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된 해로 잘 알려져 있으며, 동양사에서는 통일신라와 당나라 간의 책봉 관계가 확립되고 당나라가 토번(티베트)과의 갈등을 겪던 시기이다. 이 해는 유라시아 대륙 전반에 걸쳐 종교적 정통성 확립과 국경 안정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두드러진 시점이었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에서는 기독교 역사상 일곱 번째이자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공히 인정하는 마지막 보편 공의회인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다. 여제 이레네의 주도로 소집된 이 공의회는 726년 레오 3세 때부터 시작된 성상 파괴 운동(Iconoclasm)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공의회는 성상 파괴론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에 대한 공경은 허용하되 숭배는 하느님에게만 바쳐져야 한다는 교리를 확립함으로써 동서 교회의 갈등을 봉합하고 성상 숭배를 회복시켰다.

한반도의 통일신라에서는 제38대 원성왕 재위 3년에 해당한다. 원성왕은 즉위 초기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787년 원성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고, 이에 당나라 덕종은 원성왕을 '검교태위 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국왕(檢校太尉 鷄林州刺史 寧海軍使 新羅國王)'으로 책봉하였다. 이는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재확인받고 양국 간의 평화적인 교류를 지속하기 위한 필수적인 외교 절차였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덕종 정원(貞元) 3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정세가 지속되고 있었다. 특히 서쪽의 강력한 세력인 토번(티베트)의 군사적 위협이 극에 달해 있었다. 당나라는 토번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평량회맹(平凉會盟)'을 추진하여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으나, 이는 토번의 기만전술이었다. 787년 회맹 장소에 매복해 있던 토번군이 당나라의 관리와 장수들을 기습하여 다수를 포로로 잡아가거나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당나라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당의 대외 정책이 위구르와 연대하여 토번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역사, 특히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는 머시아(Mercia)의 왕 오파(Offa)가 자신의 권력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오파는 교황에게 청원하여 첼시 시노드(Synod of Chelsea)를 통해 리치필드(Lichfield)를 대주교구로 승격시켰다. 이는 켄트 왕국의 캔터베리 대주교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머시아의 독자적인 교회 행정권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목적이었다. 또한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787년 기록에는 바이킹이 배 세 척을 이끌고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하여 왕의 관리를 살해한 사건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잉글랜드에 대한 바이킹 침략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