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년

687년은 7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해로, 서력기원 687년이다.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 신문왕 7년, 당나라는 수공(垂拱) 3년, 일본은 주초(朱鳥) 2년 혹은 지토 천황 원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동아시아에서 나당 전쟁 이후의 긴장이 완화되고 각국이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과도기였으며,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권력 구조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신라에서는 신문왕이 삼국 통일 이후의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687년 5월 신문왕은 신궁(神宮)에 제사 지내는 제도를 정비하고 오묘제(五廟制)를 확립했다. 이는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사당을 체계화하여 왕권을 신성시하고, 진골 귀족 세력 위에서 군림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또한 신문왕은 직관(職官)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등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제 개혁을 통해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가 막후에서 절대적인 실권을 행사하며 무씨(武氏)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였다. 명목상의 황제인 예종(이단)이 재위 중이었으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태후인 측천무후에게 있었으며, 그녀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훗날 무주(武周)를 건국하기 위한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덴무 천황이 사망한 후 황후였던 지토 천황이 즉위식 없이 정무를 보는 칭제(稱制) 기간이었다. 이 시기 일본은 율령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유럽사에서 687년은 프랑크 왕국의 운명을 가른 '테르트리 전투(Battle of Tertry)'가 일어난 해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였던 피핀 2세(Pippin of Herstal)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승리함으로써, 프랑크 왕국 전체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실권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피핀 가문이 사실상의 통치자로 부상하여 훗날 카롤링거 왕조가 유럽의 패권을 쥐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종교사적으로는 로마 교황청에서 심각한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교황 코논이 사망한 직후, 로마의 성직자 계급과 군부 세력이 각각 다른 후보를 내세우며 대립했다. 테오도르와 파스칼이 서로 교황직을 주장하며 갈등을 빚었으나, 결국 타협안으로 세르지오 1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로마 교회가 내부의 권력 투쟁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의 라벤나 총독부와 얽힌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