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한국전쟁은 공식적인 전면전의 발발을 의미하는 용어는 아니나, 주로 1966년부터 1969년 사이 한반도 비무장지대(DMZ) 일대에서 발생한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과 소규모 교전 상황을 지칭한다. 서구권 학계와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시기를 '조용한 전쟁(Quiet War)' 또는 'DMZ 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1953년 휴전 협정 체결 이후 한반도 내 군사적 긴장감이 가장 높았던 시기로 기록되어 있으며, 양측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실질적인 전쟁 상태에 준하는 위기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 갈등의 배경에는 북한의 대남 전략 변화와 국제 정세의 복합적인 영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여 전 인민의 무장화와 전 국토의 요새화를 추진하며 군사력을 강화했다. 특히 남한의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인해 발생한 국내 안보 공백을 틈타 무력 통일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으며, 미국과 한국의 전력을 분산시켜 베트남에서의 연합군 작전을 방해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8년은 이러한 무력 충돌이 정점에 달한 해였다.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 소속 요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서울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1·21 사태'가 발생했다. 이어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원산 앞 공해상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나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직면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울진·삼척 지역에 대규모 무장 공비가 침투하여 민간인과 군인을 살해하는 등 게릴라전 양상이 극에 달했다.
북한의 도발은 전면적인 정규전보다는 비정규전과 소규모 습격의 형태를 띠었다. 북한은 남한 내부에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민중 봉기를 유도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남한 내 반공 의식을 고취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대응하여 남한 정부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교련 교육을 도입하는 등 국가 안보 체제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했다. 또한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국방 산업을 육성하고 군 현대화 작업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말 국제 정세가 데탕트(긴장 완화) 국면으로 접어들고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북한은 무력 도발의 실효성이 낮다는 판단하에 전술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2차 한국전쟁으로 명명된 이 시기의 분쟁은 한반도의 정전 체제가 지닌 불안정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남북 간의 적대적 대립 구도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후 남북 관계는 무력 충돌과 대화가 반복되는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당시 확립된 안보 체제는 이후 수십 년간 한국 사회의 구조적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