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노동법 날치기 사건은 1996년 12월 26일 새벽,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이 야당 의원들 몰래 국회 본회의를 열어 노동관계법 개정안과 국가안전기획부법(안기부법) 개정안을 기습적으로 단독 통과시킨 사건이다. 한국 현대 노동사 및 정치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된 사건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훼손에 반발해 전국적인 노동자 총파업과 거센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김영삼 정부는 1990년대 중반 '세계화' 기조 아래 국가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했다. 이를 위해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출범시켜 노동법 개정을 논의했으나, 경영계와 노동계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경영계는 정리해고제 도입과 변형근로제 등 노동 유연화를 요구했고, 노동계는 복수노조 허용과 제3자 개입 금지 조항 철폐 등 노동기본권 보장을 주장했다. 결국 노사 합의가 무산되자, 정부와 여당은 경영계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정부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996년 12월 26일 오전 6시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은 야당 소속 의원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국회 본회의장에 은밀히 집결하여 불과 7분 만에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날 통과된 노동법은 기업의 구조조정을 쉽게 하는 '정리해고제' 도입, 파업 시 대체인력 투입을 허용하는 '대체근로제' 도입, '변형시간근로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하였다. 반면 노동계가 핵심적으로 요구했던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은 3년 유예되었고, 교원 노조 설립이나 파업 시 무노동 무임금 원칙 등은 사용자 측에 유리하게 편향된 채 통과되었다.
이 기습적인 날치기 통과는 즉각적이고 전례 없는 전국적 저항을 촉발했다. 당시 법외노조였던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이었던 한국노총 역시 건국 이래 최초로 파업에 동참하며 양대 노총이 연대하는 한국 노동운동사 최초의 전국적 총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은 제조업, 병원, 지하철, 방송사 등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었으며 시민사회단체와 학생, 종교계, 화이트칼라 계층까지 가세하여 날치기 무효와 정부 규탄에 나섰다. 국제노동기구(ILO)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사회도 한국 정부의 반민주적 노동법 개정에 대해 강력한 우려와 항의를 표명했다.
거센 대내외적 압박에 직면한 김영삼 대통령은 결국 1997년 1월 대국민 사과를 하고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법안 재논의를 수용했다. 이에 따라 1997년 3월 여야 합의로 새로운 노동관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날치기된 법안은 폐기되었고, 정리해고제 도입은 2년간 유예되는 등의 수정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한국 노동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확인한 계기로 평가받는다. 다만 이듬해인 1997년 말 외환위기(IMF 사태)가 발발하면서, 유예되었던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 등 노동 유연화 조치들은 노사정 대타협을 거쳐 결국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