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

1854년은 19세기 중반 세계사의 격변기로,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근대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유럽에서는 크림 전쟁이 국제전으로 본격화된 해였다. 1853년 발발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충돌은 1854년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측에 가담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9월에는 연합군이 크림반도에 상륙하여 세바스토폴 공방전이 시작되었고, 발라클라바 전투와 인커먼 전투 등 참혹한 전투가 이어졌다. 이 시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단을 이끌고 전선에 투입되어 근대 간호학의 체계를 세우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쇄국 정책이 종말을 고하는 결정적인 외교적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도쿠가와 막부와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가 개항되었으며,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공식적인 외교 및 통상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는 훗날 메이지 유신의 발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 질서가 무너지고 근대적 체제로 재편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미국 내부에서는 노예제 존폐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며 내전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졌다. 5월 30일, 미국 의회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새로 편입될 주들이 노예제 허용 여부를 주민 투표로 결정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미주리 타협을 무력화시켰다. 이로 인해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의 유혈 사태인 '피 흘리는 캔자스' 사건이 발생했으며, 노예제 확대를 반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현재의 공화당이 창당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학과 공공보건 및 기술 분야에서도 인류사에 남을 진전이 있었다. 영국의 의사 존 스노우는 런던 소호 지역에서 발생한 콜레라 유행의 원인이 오염된 펌프 물임을 역학 조사를 통해 입증하여, 전염병학의 기초를 닦고 공공보건 시스템의 혁신을 이끌어냈다. 미국에서는 엘리샤 오티스가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안전 장치가 부착된 엘리베이터를 대중에게 시연하여 고층 건물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문학계에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자연 속에서의 자급자족 생활을 기록한 저서 '월든'을 출간하여 현대 생태주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의 조선 왕조에서는 철종 5년에 해당하며,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 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지배층의 수탈과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황폐해졌으며, 이 시기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해지면서 외부 세계의 변화에 대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는 향후 조선이 직면하게 될 대외적 개방 압력과 내부적 개혁 요구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