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0

1690년은 서구 역사에서 정치적 격변이 두드러진 해였다.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보인강 전투(Battle of the Boyne)이다. 7월 1일(구력), 영국의 윌리엄 3세가 이끄는 개신교 군대가 폐위된 국왕 제임스 2세의 가톨릭 군대를 격파했다. 이 승리는 영국의 명예혁명을 공고히 하고 아일랜드 내 가톨릭 세력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현대 북아일랜드 분쟁의 역사적 기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대항하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9년 전쟁)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690년 7월 10일, 프랑스 해군은 비치 헤드 해전(Battle of Beachy Head)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해상 통제권을 일시적으로 장악했다. 같은 해 육상에서는 플뢰뤼스 전투가 벌어졌으며, 프랑스군이 네덜란드,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을 물리치며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도 인류사에 남을 중요한 업적이 발표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그의 대표작인 『인간 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을 출간하여 경험론적 인식론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빛의 파동설을 체계화한 『빛에 관한 논설』(Traité de la Lumière)을 발표했다. 이러한 저작들은 훗날 계몽주의 시대와 근대 과학 혁명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인도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조브 차녹이 캘커타(현 콜카타)에 교역소를 세우며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를 위한 초기 거점을 마련했다. 북미 대륙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킹 윌리엄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퀘벡 전투가 벌어져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한반도의 조선 왕조에서는 숙종 16년을 맞아 왕자 윤(훗날의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며 후계 구도를 공식화했다.

종합적으로 1690년은 근대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던 과도기적 시기였다. 유럽 내의 패권 다툼은 식민지 전쟁으로 확산되었으며, 지적 영역에서는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 해에 일어난 사건들은 단순한 국지적 충돌을 넘어 향후 수세기 동안 지속될 국제 관계와 사상적 흐름의 원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