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년은 고려 공민왕 11년에 해당하는 해로, 한반도 역사상 외침을 극복하고 국가의 위기를 넘긴 중요한 시기이다. 이 해 1월, 정세운,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군 약 20만 명은 홍건적에게 함락되었던 수도 개경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전년도인 1361년 제2차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공민왕이 복주(현재의 안동)까지 피난을 가야 했을 정도로 큰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대규모 총공세를 통해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완전히 몰아내며 고려는 주권을 수호할 수 있었다.
개경 탈환 이후에도 고려의 북방 정세는 안정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동북면(함경도 일대)을 침공했다. 이는 고려가 무력으로 수복했던 쌍성총관부 지역을 다시 빼앗기 위한 원나라 측의 군사적 압박이었다. 이때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된 이성계가 뛰어난 지략과 기동력을 발휘하여 함흥 평야 등지에서 나하추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동북면 영토를 확고히 지켜냈으며, 이성계는 고려의 핵심적인 신흥 무인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동아시아 대륙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1362년은 원나라의 쇠퇴와 한족 무장 세력의 성장이 교차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중국 본토에서는 홍건적의 난을 비롯한 각지의 반란이 계속되며 원나라의 통치력이 급격히 와해되고 있었다. 훗날 명나라를 건국하게 되는 주원장은 장강 하류 지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진우량, 장사성 등 다른 한족 군벌들과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 대륙의 극심한 혼란은 고려가 친원파를 숙청하고 자주성을 회복하는 외교적, 군사적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지정학적 배경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1362년 1월 중순, 북해 연안을 강타한 역사상 최악의 폭풍해일 중 하나인 성 마르켈루스의 홍수가 발생했다. 이 거대한 폭풍 해일로 인해 잉글랜드, 네덜란드, 북독일, 덴마크 등 해안 지역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거대한 파도는 해안선을 영구적으로 바꿔놓았으며, 룬홀트를 비롯한 수많은 해안 도시와 마을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최소 2만 5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거대한 자연재해는 흑사병으로 이미 큰 타격을 입었던 14세기 유럽 사회에 다시 한번 치명적인 인구 감소와 경제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또한 1362년의 유럽 정치 및 종교사에서도 굵직한 변화가 있었다. 프랑스 남부에서 교황청을 이끌던 아비뇽 유수기 시절, 교황 인노첸시오 6세가 선종하고 9월에 우르바노 5세가 제200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우르바노 5세는 훗날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일시 복귀시키는 등 개혁을 시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편 서유럽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브레티니 조약으로 일시적인 휴전 상태에 들어갔으나, 전쟁에 동원되었던 용병 무리들이 해고된 후 프랑스 전역을 떠돌며 약탈을 일삼아 심각한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고 있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