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4

1244년은 중세 유럽과 중동, 그리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정치적, 종교적 격변이 일어난 해였다. 특히 중동 지역에서는 십자군 전쟁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해 8월,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가 고용한 콰리즈무 용병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1229년 제6차 십자군 이후 기독교 세력이 통제하던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 세력권으로 넘어갔으며,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예루살렘은 기독교 세력의 손에 돌아오지 못했다.

예루살렘 함락 직후인 10월 17일, 가자 근처의 라 포르비(La Forbie, 하르비야)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십자군 국가들과 다마스쿠스의 이슬람 연합군은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콰리즈무 용병 연합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라 포르비 전투는 하틴 전투 이후 십자군 세력이 겪은 가장 치명적인 군사적 손실로 평가받는다. 이 패배는 레반트 지역에서 십자군 국가들의 군사적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종교적 이단 심문과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알비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 중 하나였던 몽세귀르(Montségur) 성이 10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3월에 함락되었다. 성 안에 있던 약 200명의 카타리파 신도들이 화형에 처해졌으며, 이로써 카타리파 세력은 사실상 궤멸 단계에 접어들었다. 한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갈등을 피해 로마를 떠나 프랑스의 리옹으로 피신했다. 이는 이듬해 열린 제1차 리옹 공의회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동아시아의 고려 왕조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에서 항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1244년 당시 고려는 몽골의 거듭된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해진 상태였으나, 집권층인 무신 정권은 강화도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저항을 지속했다. 이 시기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대장경 판각 사업인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 간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는 외부의 압력 속에서도 문화적 자긍심과 종교적 결속력을 유지하려 했던 고려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문화와 사상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신비주의 시인인 루미(Rumi)는 1244년 11월 15일, 아나톨리아의 코니아에서 자신의 영적 스승인 샴스 타브리지(Shams Tabrizi)를 처음 만났다. 이 역사적인 만남은 루미의 사상과 문학에 전환점이 되었으며, 훗날 이슬람 영성 철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수많은 시편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잉글랜드에서는 국왕 헨리 3세가 옥스퍼드 대학교의 권한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교육 기관의 정비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