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9년

1159년은 고려 제18대 국왕 의종이 재위 13년을 맞이하던 시기로, 고려의 문벌 귀족 문화가 정점에 달했던 해다. 당시 고려 사회는 문신들이 정치를 주도하며 화려한 귀족 문화를 꽃피웠으나, 이면에서는 무신들에 대한 차별과 소외가 깊어지고 있었다. 의종은 유흥과 연회, 정자 건립 등 토목 사업에 탐닉하며 예술적 감흥을 즐겼는데, 이러한 사치스러운 궁정 생활은 국가 재정의 부담과 무신들의 불만을 초래하여 훗날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잠재적 원인을 제공했다.

예술사적 측면에서 1159년은 고려청자의 발전사를 규명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지표가 되는 해다. 이 해에 사망한 고려의 문신 문공유(文公裕)의 묘지명과 함께 출토된 '청자 상감 국화 모란무늬 대접'은 고려의 독창적인 공예 기법인 상감 기법의 정착 시기를 알려주는 핵심 유물이다. 이를 통해 12세기 중엽에 이미 화려하고 정교한 상감 청자 제작 기술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학술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 고려의 미의식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이른바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 발발하여 무사 계급이 중앙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교토를 무대로 발생한 이 내란은 조정 내부의 권력 다툼과 결부되어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중심으로 한 다이라 가문과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를 중심으로 한 미나모토 가문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 분쟁에서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권력을 장악함에 따라, 일본은 공가(公家) 중심의 통치에서 무가(武家) 중심의 사회로 이행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긴밀하게 얽힌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1159년 교황 아드리아노 4세가 사망한 후 알렉산데르 3세가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대립 교황 빅토르 4세를 옹립했다. 이로 인해 가톨릭교회는 심각한 분열에 직면했으며,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치열한 대립은 이후 유럽 국제 정세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중세 유럽 사회의 특징적인 갈등 구조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남송(南宋)과 금(金)나라가 대치하는 형국이 지속되었다. 남송은 북방 영토를 잃은 채 강남 지역으로 물러나 있었으나, 수도 임안을 중심으로 상업과 수공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금나라는 해릉왕의 주도하에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며 남송 정벌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1159년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기존의 세력 균형 속에서 새로운 변동의 씨앗이 자라나던 긴장의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