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7

1087년은 11세기 후반의 해로, 서유럽과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권력의 교체와 정치적 변혁이 일어난 시기다. 특히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공국을 통치하며 노르만 왕조를 개창한 윌리엄 1세(정복왕 윌리엄)가 서거하면서 서유럽의 정치 지형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윌리엄 1세는 프랑스 필리프 1세와의 전쟁 중 부상을 입고 루앙 인근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영지는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장남 로버트 커토즈는 노르망디 공국을, 차남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며 권력이 나뉘게 되었다.

지중해와 발칸반도 지역에서도 중요한 군사적 사건들이 전개되었다. 이탈리아의 해상 공화국인 피사와 제노바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의 지리드 왕조를 공격하는 마디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 원정은 상업적 이권 확보와 기독교 세력의 확장을 목표로 했으며, 훗날 전개될 십자군 운동의 전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은 발칸반도 북부에서 페체네그족과 드리스라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를 당했다. 이 패배로 인해 제국의 북방 방어선은 극도로 약화되었으며,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제국 유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동아시아의 일본에서는 정치 체제의 중대한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시라카와 천황이 아들인 호리카와 천황에게 양위한 후, 상왕으로서 실권을 행사하는 인세이(院政, 원정) 체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는 후지와라씨의 섭관 정치를 억제하고 황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으며, 향후 수백 년간 일본 정치의 독특한 구조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도호쿠 지방의 권력 투쟁이었던 후삼년의 역이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개입으로 종결되면서 무사 계급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중국 북송 시대에는 철종의 재위 기간이었으나, 조모인 고태후가 섭정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왕안석의 신법을 둘러싼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이 격화되던 때로, 사마광을 중심으로 한 구법당이 정권을 잡고 신법을 대거 폐지하며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소식(소동파)과 같은 문인들이 활발히 활동하며 송대 문학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한 정이와 정호 형제의 가르침이 확산되며 유교 철학의 심화가 이루어지던 시점이다.

종교와 문화 측면에서는 소아시아의 미라에 안치되어 있던 성 니콜라우스의 유해가 이탈리아의 바리로 옮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비잔티움 제국이 셀주크 튀르크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서구 기독교 세력이 성유물을 확보한 사례로, 이후 바리는 주요 성지 순례지로 급부상했다. 또한 셀주크 튀르크의 전성기를 이끈 말리크샤 1세와 재상 니잠 알 물크의 통치 하에서 이슬람 세계의 학술과 예술이 번영을 누렸으며, 천문학과 수학 등 과학 기술의 발전이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