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4

1084년은 율리우스력의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며, 11세기에 해당하는 연도이다. 세계 각지에서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다수 발생한 해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 간의 갈등이 정점에 달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방대한 역사서가 완성되는 등 각 문화권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 시기였다.

유럽사에서 1084년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사이의 서임권 투쟁이 격화되어 극단적인 충돌로 이어진 해다. 하인리히 4세는 로마를 점령하고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내세워 자신을 황제로 대관하게 했다. 위기에 처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뒤 노르만족 지도자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기스카르의 군대는 교황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로마 시내를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하는 '로마 약탈(Sack of Rome)'을 자행하여 도시에 큰 상처를 남겼다.

종교사적으로도 1084년은 의미 있는 기점이 되는 해다. 독일 쾰른 출신의 수사 브루노(Bruno of Cologne)가 프랑스 그르노블 인근의 샤르트뢰즈(Chartreuse) 산맥 깊은 곳에 은둔처를 세우고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시작했다. 이 은둔 공동체는 훗날 가톨릭 교회 내에서 가장 엄격한 관상 수도회 중 하나로 평가받는 '카르투시오회(Carthusian Order)'의 기원이 되었다. 이들은 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채 침묵과 고립 속에서 노동과 기도를 병행하는 독특한 규칙을 확립했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 북송에서는 사마광(司馬光)이 주도하여 편찬한 방대한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이 1084년에 마침내 완성되었다. 영종의 명을 받아 1065년에 편찬을 시작한 지 19년 만의 결실이었다. 전국시대부터 오대십국 시대까지 총 1,36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이 책은 통치자를 위한 제왕학의 교과서로 불리며, 이후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역사 서술과 정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사에서 1084년은 고려 왕조 제13대 국왕인 선종(宣宗)의 재위 1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 고려는 거란(요나라) 및 송나라와 활발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안정적인 국정을 도모하고 있었다. 선종은 불교를 장려하고 과거 제도를 정비하는 등 내치에 힘썼으며, 주변국과 사신을 교환하여 국제 정세 속에서 고려의 입지를 다졌다. 한편, 이 해에는 중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송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자 사(詞)의 대가 이청조(李淸照)가 출생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다채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