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년

1002년은 고려 제7대 국왕 목종이 재위한 지 5년째 되는 해이며, 중국의 송나라는 함평 5년, 요나라는 통화 20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 고려는 거란의 1차 침입 이후 외교적 긴장을 유지하며 내부적인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특히 목종은 전시과 제도를 개편하고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함으로써 고려의 국가 운영 시스템을 안정화하려 노력했다. 동아시아 정세는 송과 요의 대립 속에서 세력 균형이 유지되던 시기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의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었다. 송의 진종은 요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쪽 국경의 수비를 강화했으나, 요나라는 끊임없이 송의 영토를 위협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대립은 몇 년 후인 1004년 전연의 맹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으며,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외교적 변화를 야기했다. 고려 역시 이러한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서 송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요의 압박에 대처하는 복합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큰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다. 로마 제국의 부활을 꿈꾸던 오토 3세는 21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팔레리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 이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권력 다툼 끝에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2세의 즉위는 신성 로마 제국이 이전의 보편 제국 이념에서 벗어나 독일 내부의 결속과 교회와의 협력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선회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국왕 에델레드 2세의 명령에 의해 '성 브라이스 축일의 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1월 13일, 에델레드 2세는 잉글랜드 내에 거주하던 데인인들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들을 모두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이 학살로 인해 덴마크 왕 스벤 1세의 여동생 구닐드를 포함한 수많은 데인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덴마크의 대대적인 보복 침공을 불러일으켰으며, 훗날 잉글랜드가 덴마크 왕국에 의해 정복당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바실리우스 2세 황제가 불가리아 제국을 정복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는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년에 걸친 장기전을 수행했으며, 1002년에도 불가리아의 요충지를 공략하며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중세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영토를 확장하던 과정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1002년은 동서양 모두에서 기존 권력의 교체와 민족 간의 갈등이 미래의 거대한 역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