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미즈드 4세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제21대 샤한샤로, '불멸의 영혼'이라 불린 호스로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이다. 579년에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가 구축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그의 통치기는 대내외적인 긴장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로 평가받으며, 특히 귀족 세력과의 극심한 대립이 그의 치세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호르미즈드 4세의 내치는 귀족 및 조로아스터교 사제 계급의 특권을 억제하고 하층민과 농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개혁 정치를 계승하여 공정한 세금 징수와 사법 정의를 강조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부패를 저지른 고위 귀족과 관료 수천 명을 처형하거나 숙청했다. 이러한 강경책은 민중의 지지를 얻기도 했으나, 왕권에 도전받는 기득권층의 강력한 원한을 샀고 결과적으로 사산 왕조 내부의 정치적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동로마 제국과의 오랜 전쟁을 지속했으며, 동시에 북방과 동방에서 위협해 오는 투르크(돌궐) 세력에 대응해야 했다. 588년경 투르크가 대규모로 침공해 오자, 그는 유능한 장군 바람 초빈을 파견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호르미즈드 4세는 승전 장군인 바람 초빈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그를 불신하고 모욕했으며, 이는 결국 바람 초빈이 반란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종교 정책 측면에서 그는 비록 조로아스터교 국가의 수장이었으나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조로아스터교 사제 계급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포함된 것이었다. 그는 사제들이 기독교 박해를 요구할 때마다 "왕좌가 두 앞발(조로아스터교)에만 의지할 수 없으며, 뒷발(기독교 등 타 종교)도 있어야 견고하다"는 취지의 논리로 이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호르미즈드 4세의 말년은 비극적이었다. 바람 초빈의 반란군이 수도를 향해 진격하는 가운데, 590년 궁정 내부에서 비스타암과 빈두이흐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호르미즈드 4세는 폐위되어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호스로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호르미즈드 4세 시기의 극심한 내분과 장군의 반란은 사산 왕조가 장기적인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서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