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숭(許嵩, 1634~169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중보(仲甫)이다. 영의정을 지낸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정익(李廷益)의 딸이다. 남인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에 가문의 배경과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1662년(현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후 설서, 검열, 정언 등을 거쳐 지평, 문학, 수찬 등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에는 승지에 올랐으며, 이후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거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그는 행정적인 실무 능력과 문장력을 겸비하여 조정 내에서 남인 측의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이 발생하면서 허숭의 운명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서인 세력은 허숭의 서제(庶弟)인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과 공모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제기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 허적과 동생 허견은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허숭 또한 이 사건에 연좌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가문이 몰락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그는 가문의 화와 함께 함경도 갑산 등지로 유배되어 오랜 기간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복권되었다.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이미 가문의 참변과 오랜 유배 생활로 인해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는 복권된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1693년(숙종 19)에 세상을 떠났다.
허숭의 생애는 조선 후기 당쟁의 격화와 환국 정치가 개인의 삶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을 잘 보여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온건한 성품과 관료적 능력을 지녔으나, 남인 가문의 핵심 일원으로서 겪어야 했던 정치적 부침은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삶은 숙종 대의 치열했던 당파 싸움과 그에 따른 가문의 흥망성쇠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