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니스트>(La Pianiste, 2001)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연출한 심리 드라마로, 오스트리아의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빈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인 중년 여성 에리카 코후트가 젊은 공학도 발터 클레머를 만나며 벌어지는 파괴적인 욕망과 심리적 균열을 다룬다. 이 작품은 2001년 제54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더불어 남녀 주연상을 동시에 석권하며 미카엘 하네케의 거장으로서의 입지를 굳힌 작품이다.
주인공 에리카는 겉으로는 엄격하고 결벽에 가까운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유지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심각하게 왜곡된 성적 욕망과 가학적, 피학적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는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을 강박적으로 통제하는 노모와 한 침대에서 생활하며 숨 막히는 심리적 동거를 이어간다. 하네케 감독은 에리카가 포르노 상영관을 방문하거나 타인의 성행위를 훔쳐보고, 자해를 통해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는 과정을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포착하며 인간의 이중성을 폭로한다.
에리카의 단조롭고 억압된 삶은 뛰어난 재능과 외모를 지닌 제자 발터 클레머가 등장하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발터는 에리카에게 순수한 애정과 동경을 품고 접근하지만, 에리카는 그에게 자신의 극단적인 성적 취향과 가학적인 요구가 담긴 편지를 전달하며 관계를 권력 투쟁의 장으로 변질시킨다. 두 인물의 관계는 로맨틱한 연애의 전형을 완전히 탈피하여, 지배와 피지배의 욕망이 충돌하는 파국적인 방향으로 치닫는다.
미카엘 하네케는 영화 전반에 걸쳐 배경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고정된 카메라 앵글을 활용하는 특유의 절제된 연출 기법을 선보인다. 슈베르트와 슈만 등 고전 음악의 우아함과 대비되는 에리카의 처참한 정신적 붕괴는 고결한 예술의 뒷면에 숨겨진 인간의 비열하고 본능적인 심연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인물의 감정을 과잉되게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소외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주연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이 영화의 예술적 성취를 완성하는 핵심 요소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감정이 메마른 듯한 차가운 표정 속에 숨겨진 광기와 고통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에리카라는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피아니스트>는 개봉 당시 파격적인 소재와 묘사 수위로 인해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인간 내면의 어두운 본성을 가장 깊이 있게 탐구한 현대 영화사의 걸작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